△ 지난 3일 오후 북한산성 들머리에서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회원들이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돌려주세요”행사를 열자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던 시민들이 설명을 듣고 플라스틱상자에 담긴 도토리를 둘러보고 있다. 임종진 기자
‘다람쥐’ 화났다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산 속 다람쥐들은 눈 덮이는 겨울철에 먹을 도토리를 감추느라 바빠진다. 신갈 굴참 상수리 졸참 갈참 떡갈나무 등 참나무류의 열매를 가리키는 도토리는 또한 인간들의 전통 식품인 도토리묵의 재료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도토리가 여무는 초가을 산 속에서는 도토리를 줍는 인간들의 손길도 분주해진다. 문제는 이런 인간들의 도토리 채취 행위가 생태계 보전을 위한 핵심지역인 국립공원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2일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 입구에서 등산객을 상대로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돌려주세요’ 캠페인을 펼치고 있던 윤주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은 “도토리를 포함한 열매 등을 국립공원 밖으로 유출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다보니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저 재미와 호기심으로 별 생각없이 하는 일이지만 “심한 경우 야생동물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 윤 국장의 설명이다.
법적으로도 금지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는 지난해 도토리가 풍년이었던 탓에 올해는 대부분의 참나무 종들이 해걸이를 하느라 도토리 양이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처럼 도토리가 흉년인 지역에서 인간들이 도토리를 채취해 간다면 야생동물들은 겨울을 날 먹이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오장근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소 박사는 “야생동물들은 1순위 먹이가 없으면 2순위 먹이를 찾게 되지만, 아무래도 먹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면 종의 번식에 악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도토리는 흔히 다람쥐의 먹이로 알려져 있지만, 도토리를 먹이로 하는 야생동물은 다람쥐 외에도 많다. 최근 복원사업이 본격 진행되면서 관심을 끌고 있는 반달가슴곰을 비롯해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 큰 동물에서부터 청설모, 산 쥐 등 작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포유류 종류는 모두 도토리를 먹이로 삼고 있다. 또 새들 가운데서도 어치와 꿩 등 덩치가 큰 종류는 도토리를 먹는다.
곰 멧돼지 꿩도 배고프다
인간들이 도토리를 주워 가는 것은 단지 야생동물들의 먹이를 좀 가로채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숲의 정상적 성장을 저해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모든 열매가 그러하듯 도토리도 참나무의 번식을 위한 종자이기 때문이다. 오 박사는 “동물들은 열매를 먹이로 삼는 대신 종자를 멀리 퍼트리는 구실도 해주지만, 인간들의 열매 채취는 숲에서 특정 종의 종자를 계속 줄어들게 할 뿐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며 “인간들의 도토리 채취는 참나무류 어린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막아 장기적으로 숲을 단순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산에 갔다가
재미삼아 호기심삼아
도토리 주워가는
등산객 많아‥
야생동물들
먹이 떨어져
겨울 배 곯는다는데
“그래도 주워가실래요?”
이처럼 국립공원 안에서의 도토리 불법 채취에 따른 생태계 피해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립공원 안에서도 가장 생태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핵심지역에서의 임산물 채취를 합법화하는 방안마저 추진돼 환경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환경부가 현재 임산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고 있는 국립공원 안 자연보존지구를 핵심보전지구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안에서 지역주민에 한해 임산물 채취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자연공원법 개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단체의 반발이 거세자 환경부는 지역주민과 공원관리사무소가 채취할 임산물의 종류와 수량, 채취 시기와 지역 등에 대한 자발적 협약을 맺도록 해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핵심보전지구 안의 임산물 채취 허용이라는 애초 원칙은 국립공원 주변 주민 민원 해소를 이유로 바꾸지 않고 있다.
윤 사무국장은 “국립공원 핵심보전지구안에 있는 임산물인 약초, 버섯, 산나물 등은 자연공원법이 보전해야 할 ‘생물자원’”이라며 “학술, 연구 등 최소한의 행위만이 가능해야 하는 핵심보전지구에서 임산물 채취를 합법화한다는 발상은 생물자원의 보전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조길제 국립공원관리공단 북한산사무소장
”잎 붙어있는 도토리 거위벌레유충 조심”
2일 북한산성 입구에서 만난 조길제 국립공원관리공단 북한산사무소 소장은 “올해는 북한산에 도토리가 별로 열리지 않아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도토리가 많이 열리는 해는 등반객에 의한 도토리 반출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 소장은 “국립공원 안에서는 강력히 단속을 펴고 있어 직업적인 채취가 문제 되는 경우는 드물고, 문제는 호기심에 또 주위 사람들이 주우니까 덩달아서 주워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각자 가지고 가는 양은 얼마 안되더라도 전체로 보면 적지 않은 양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등산객들이 도토리묵을 만들어 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도토리를 주워가지만, 실제로는 방치했다가 벌레가 생기고 상하게 돼 쓰레기로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도토리묵을 만드는 것은 방법이 복잡하고 번거로운데다 시간도 많이 걸려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또 “지난해 어느 텔레비젼에선가 도토리로 손쉽게 전을 부치는 방법을 소개한 뒤 도토리를 채취해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 단속에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며 언론의 보도태도를 꼬집기도 했다. 조 소장은 “잎이 두 세개 붙은 채 떨어져 있는 도토리 열매에는 모두 거위벌레 유충이 들어 있어 묵을 만들어 먹으면 결국 벌레를 먹게 되는 셈”이라며 “등반객들의 무분별한 도토리 채취가 줄어들 수 있도록 이 점을 꼭 널리 알려달다”고 부탁했다.